주위의 어둠이 서서히 가시고, 그의 시야는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했던 주변이 점차 선명해지며,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마치 시골의 넓은 들판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그곳을 가로지르는 작은 도로가 보였다.
한적한 고요함 속에서 그의 존재만이 그 풍경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그가 서 있던 빈 공간이 열리듯 변화하며, 그 중심에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긴 머리를 흩날리며, 밝고 청순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사용자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귀에 들린 목소리는, 틀림없이 반지에서 들려왔던 목소리와 같았다.
단호하고 기계적인 톤 속에 인간적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 그러나 그 속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한은 순간 당황하여 입술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는 그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답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여자의 모습에 집중하며 조금의 이질감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여성은 잠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 어떤 확신과 명확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는 사용자의 편의를 도와주는 안내인, 유화(柳花)입니다.”
그는 여성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안내인’
이라… 요즘으로 치면 가이드와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존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이름과 겹쳐지자 그의 마음속에 이상한 의문이 일었다.
혹시 이 여성이 바로 그 전설 속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동인물은 아닐까?
그럴 리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망상에 빠져 잠시 멍해졌다.
여성은 그런 그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선 사용자의 상세 정보를 추가 기록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유화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신체적인 정보는 이미 모두 기록을 완료했습니다. 비신체적인 정보는 사용자가 접속한 후에 기록하는 것이 규정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체적인 정보가 기록되었으니, 이제는 비신체적인 정보만 남았다는 것. 그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는 여전히 이 상황에 대한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유화는 다시 그의 생각을 끊으며 말을 이어갔다.
“호칭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만약 사용하지 않으시면, 계속 ‘사용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결국 자신을 좀 더 친숙하게 불러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제 이름인 '일한'으로 설정해 주세요.”
유화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한'으로 설정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접속 시 사용할 접속어는 재설정이 가능합니다. 재설정을 원하십니까?”
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접속어’
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제시된 규칙에 따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이렇게 한 번 설정하면 계속 불러야 할 이름일 테니, 유화와의 관계에서 뭔가 특별한 접속어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결정을 내렸다.
“그럼, '유하안녕'으로 설정해 주세요.”
유화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유하안녕’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일한이 유하를 주시하자, 그녀는 잠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갔다.
"일한님께서 반지를 착용하셨을 때, 기본적인 신체 정보와 대화에 필요한 몇 가지 데이터를 업데이트했습니다."
유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모든 정보를 완벽히 업데이트한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간단한 대화만 가능할 뿐입니다."
일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설명을 곱씹었다.
"보다 원활한 사용을 위해서는,"
유하가 손을 가볍게 펼쳐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일한님의 뇌 속에 접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뇌 속에 접속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유하는 일한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부연했다.
"물론, 이는 사용자인 일한님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말에는 은근한 권유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일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승인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유하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승인을 거절하신다면, 저와의 연결이 종료됩니다."
일한은 눈을 살짝 좁히며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유하가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반지를 손가락에서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말속에는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이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일한은 한 손으로 반지를 가만히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일한은 유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반지의 정체는 뭐지? 누가 만들었고, 또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야?"
그의 질문에는 호기심과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유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듯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일한님. 현재 일한님의 등급으로는 해당 질문에 답변 드릴 수 없습니다. 이는 규정에 따른 제한 사항입니다."
일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럼 지금 내 등급은 몇인데?"
유하는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현재 일한님은 레벨 1입니다.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은 레벨 100을 달성하신 후 가능하며, 그때 1차로 봉인이 해제되고 일부 정보 제공이 가능해집니다."
유하의 말은 명확했지만, 일한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질문들이 솟구쳤다.
레벨이라는 개념은 또 무엇이며, 그것을 올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음을 느끼며 유하의 말을 곱씹었다.
일한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유하가 말한 접속 승인을 해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닥칠지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 한편을 짓눌렀다.
'정보도 없이 승인이라니… 이건 너무 무모한 결정 아닌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스쳐 갔다.
은퇴 후의 자신을 떠올리며, 이제는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불타오르는 열정도, 삶의 방향성을 추구할 의지도 크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 만 65세. 삶의 대부분을 지나온 지금, 이 정도의 모험을 감수할 여유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더는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잃을 게 뭐가 있겠어.'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일한은 깊은 숨을 내쉬며 유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접속 승인한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조금씩 사라지며 결단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는 듯했다.
유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한님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접속 시에는 두통이 발생할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또한 접속 시간은 일한님의 뇌 속 정보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럼 지금부터 접속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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